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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연 회장

자신(自身)이 있기까지의 선조(先祖)를 비롯한 전 종친(宗親)의 기록이 모셔진 것이 족보(族譜)이므로 족보의 소장(所藏)을 모신다고 했고 머리맡이 아니면 모실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방바닥에 펴놓고는 넘어 다닐 수도 없었던 것이 족보였습니다. 그토록 소중(所重)했던 족보가 근간(近間)에 와서는 오히려 종족(車氏와 柳氏)간에 分裂의 원인이 되고 말았으니 세태(世態)탓이나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부끄러운 우리 문중(門中)입니다. 더구나 차릉(車陵)의 차 건 신(車建申)할아버지(車氏 32世孫)를 비롯한 5대단(5代 壇)할아버지와 구월산에 모셔져 계신 류 차 달(柳車達) 할아버지가 그 불신(不信)의 초점(焦點)이 되어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그 피해(被害)를 피하고 떳떳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되 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구간(區間)의 족보입니다.

신라 제39대 소성왕(昭聖王)이 임종(臨終) 직전에 12세 어린 태자에게 왕위(哀莊王)를 맡기면서(서기800년) 승상(承相)이신 차 건 신(車建申)公에게 그 보상(輔相)을 부탁했지만 애장왕(哀莊王)을 돕던 公도 오래지 않아 노령(老齡)으로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애장왕이 公의 장례(葬禮)를 왕의 례(王禮)로 치른 후 소성왕묘(廟)에 배향(配享)하고 공의 묘(墓)를 차릉(車陵)이라 명명(命名)했던 것입니다.

그 후  차 건 신(車建申)공(公)의 아들 좌승상(左承相) 차 승 색(車承穡)公도 아버지를 이어 애장왕을 돕던 중 김 언 승(彦昇)이 자기 조카 애장왕을 시해(弑害)하고 제41대 헌덕왕(憲德王809년)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에 분개한 차 승 색公이 아들 사공(司空) 차 공 숙(恭淑)公과 함께, 애장왕의 원한을 갚으려고 하다가, 그 뜻이 탄로(綻露)되어, 피신(避身)할 수밖에 없었던 곳이, 황해도 신천(儒州)군 九月山이었습니다. 그러고도 견딜 수 없어 바꾼 姓이 조모의 성 양(楊)씨와 유사(類似)한 유주(儒州) 柳氏이고, 이름도 바꾸어 차 승 색(車承穡)공은 柳 穡공이 되었고 아들 차 공 숙(車恭叔)공은 柳叔공이 되었으며 둘째 아들 차 공 도(車恭道)공은 강남으로 가 王씨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도 류 진 부(柳振阜) 류 무 선(柳茂先) 류 보 림(柳普林)공까지 5대로 이어진 은둔(隱遁)생활은 분묘(墳墓)도 남기지 못한 채 끝날 수는 있었지만 그 영혼(靈魂)도 근대에 와서야 차릉 앞 5대단(五代壇)에 모셔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류 색(柳穡)公의 5대손인 대승(大丞) 류 차 달(柳車達)公이 고려 건국(建國 918년)에 큰 공(功)을 세워 고려 태조 왕건 조(王建朝)에 삼한벽상 2등공신이 되었고 관향(貫鄕) 유주(儒州)를 다시 바꾸어 문화 류씨(文化 柳氏)의 시조(始祖)가 되었으며 공의 큰 아들 류 효 전(柳孝全)공은 벼슬 대광백과 함께 옛 성(姓)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해서 연안 차씨(延安車氏) 시조(始祖)가 되었고 둘째 아들 류 효 금(柳孝金)공은 좌윤의 벼슬로 아버지를 이어 문화 류씨(文化柳氏)로 내려오게 된 것이 족보(族譜)의 기록입니다.

여기에서 車氏와 柳氏는 분열(分裂)을 멈추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라의 재상(宰相)으로 남부럽게 살던 가문(家門)이 5대(代)에 걸친 유골(遺骨)까지 버리고 변성명(變姓名)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부끄러운 역적(逆賊)생활을 왜 거짓으로 꾸며 후손을 속여야 했으며 더구나 자기 후손(後孫)에게 어떻게 엉뚱한 사람을 조상(祖上)이라고까지 속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변성(變姓)의 타당성(妥當性)은 믿지 않고 서로가 분열(分裂)에만 힘쓰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조상(祖上)에 대한 배신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족보가 허위(虛僞)였다면 국사(國史)와 겹친 허위가 어찌 그때 바로 들통나지 않고 천여 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밝혀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분열(分裂)이 아니라 자기 뿌리에 대한 반역이고 뿌리없는 나무가 될 뿐입니다. 싸운다고 해서 한 할아버지의 후손(後孫)이 남이 될 수도 없지만 남이 된다고 해도 우리에게 얻어지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태(世態)가 험악할수록 오히려 모르는 사람과도 손을 잡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족보가 소중하고 믿고 모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우리도 떳떳한 문중(門中)의 후손이고 싶다면 조상(祖上)에 대한 배신은 이제 그만두고 종족간(宗族間)에 잡은 손만이라도 뿌리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2018. 5. 12. 柳氏 釜山宗親會 會長 兼 車柳 釜.慶宗親會 會 長 柳 志 演

2017년 3월 2일

《차원부설원기(車原頫雪冤記)》는 위서인가?

 

 

연안차씨종친회 중앙본부 문헌 위원회

1.서론

세조2년(1456) 박팽년이 찬했다는 《차원부설원기》는 《설원기(雪冤記)》 《설원록 (雪冤錄)》 《운암선생설원록(雲巖先生雪冤錄)》 《간의대부차원부설원기(諫議大夫車原頫雪冤記)》 (1708) 《차문절공유사(車文節公有事)》 (1791) 등 이본의 형태로 전해져 온다. 이하 편의를 위하여 《설원기》라 통칭 하겠다.

이에 대한 연구는 이미 서울대 박은정의 “《차원부설원기》 이본의 유통과 그 배경”에서 충분한 연구를 한 바 있다. 이에 의하면 《설원기》는 1456년 5월 17일 왕명을 받들어 박팽년이 기를 쓰고, 신숙주, 성삼문, 이개, 류성원 등이 응제 시와 주석을 썼으며 하위지가 5월 21일 서문을 작성하여 완성한 책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곧 이어 1456년 6월에는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설원기》 저작에 관여하였던 집현전 학자들의 대부분이 이에 관련됨으로 인하여 간행되지 못하고 1500년대 후반기까지는 필사본으로 주로 영남학파에서 읽혀진 것으로 알려졌다.

《설원기》에 대한 위작 논란은 편찬에 참여한 수십여 명의 대학자들의 사후이라야 할 것이니 1500년대 중반 이후일 것이다. 1500년대부터 1700년대 초반까지 근 200년간 <설원기>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1700년대 중반에는 일부의 학자들이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1800년대가 지나고 나서는 설원기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한미한 차씨 집안을 감추기 위해 조선 전 사대부가를 상대로 위작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를 구명하기 위하여 이제 《설원기》가 위작인가를 연구해 보았다.

최초의 《설원기》에 대한 기록은 구봉령(1526~1586)의 《백담선생문집》 권9에 소개된 바 있으며,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1589)에도 많은 쪽수를 할애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때까지는 필사본으로 전하여 내려 왔으며 활자화로 간행된 책은 없었다. 이들 필사본은 국립 중앙도서관에 1부가 보관되어 있으며, 차문에서는 필사본의 잔편을 수집하여 1700년대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설원기>를 간행한 바 있다. 이에 대한 현황은 <표 1>에 있다.

표1 설원기 발간 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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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설원기》는 김종직이 대표로 나타내는 영남학파의 충신 불사이군 정신의 강조를 위한 교재로서 필사본의 전파가 많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각자 필사본을 만들 때 완벽한 필사를 하지 못한 점으로 판형에 따라 변형 변질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완벽한 원본을 찾지 못하였다.

《설원기》에 대한 위서 논란은 18세기 초 남극관(1689~1714)의 《몽예집》에 발표된 후 이에 영향을 받은 홍계희(1708~1711), 윤광소(1708~1786), 황윤석 등이 의심한 바 있으며, 1791년 규장각 학자들이 《차문절공유사(車文節公有事)》를 운각 간으로 목판 인쇄 반포 후에는 《설원기》의 위작 논란은 없었다. 따라서 《증보문헌비고》 (1908)에서 차문 및 류문의 연혁을 현 족보와 같이 《설원기》에서 제시된 계보를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가 국가가 제작한 공가 문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는 없다.

그 후 《설원기》의 위작 논란은 없었으나 1980년대 이수건 영남대 교수의 논문 발표를 시작으로 류문의 류** 교수 등이 이를 들추어 각종 인터넷을 통하여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진위를 검증하지도 않고 1000여년의 차문과 류문의 동조이성 관계를 허물어트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는 우리 세대 모두를 죄인을 만드는 우를 저지른 것이다. 그래서 그간에 차문이 연구한 내용을 발표하게 되었다.

 

2.본론

 

가. 위조 교지에 대하여

 

충남대 류**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교지라 하면 왕이 일정한 품계 이상의 벼슬이나 시호 등을 내리는 임명장이다. 그런데 차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교지를 족보와 각종서적에서 선전하고 있다. 차문에서 위조한 교지(敎旨)에는 차원부에게 벼슬들을 증직(贈職)하고 있고,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내린다고 쓰여 있으며, 시호의 해설이 주어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날짜이다. 바로 경태 7년(세조2년, 1456년) 5월로, 6월 2일의 사육신변고 직전의 시기이다. 그런데 『일성록』에 따르면 차원부의 시호를 내린 적이 없음이 공식 확인된다. 차문에서는 이것이 위조가 아님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심각한 도덕적 타격을 받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차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2016년판 23호차문종보 72쪽에 실려 있는 1804년12월 12일 승정원일기에 ”동부승지 이현묵이 이조의 말을 아뢰기를 문절공의 시호를 받은 차원부의 시호를 받아들이는 연시행사가 전라도 순천 땅에서 행한다고 아뢰니 알았다고 전하셨다”라는 글이 천산 양희철 씨에 의하여 밝혀졌으니 문절공 차원부의 교지가 가짜라는 류 교수의 주장은 잘못 된 것이다. 이에 의하면 현 차문에서 가지고 있는 교지가 위조라고 주장할 수 없다.

 

나. 차원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

 

영남대 이수건 교수는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 조작> (대구사학, 제86집, 2007) 라는 논문에서 “차원부 일가가 죽음을 당할 때 가해자들이 서얼계란 사실이 기재된 차류동보(車柳同譜)가 해주 신광사에서 소각되고 말았다는 내용도 한국족보사(韓國族譜史)에서 본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 최초의 편간족보(編刊族譜)가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1476) 이므로 그보다 70년 전인 태조 7년에 차류족보가 판각될 리 없으며 또 차씨와 류씨가 동조동원이라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차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문화류씨 문중에서 1423년 간행된 《영락보》로 현재 서문만이 전해져와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으나, 이를 인정해야 한다. 1398년 이전에 《차류보》를 만들었다면, 《영락보》를 만들기 25년 전 일이다. 특히 서울대 이태진의 논문 <15세기 후반기의 거족과 명족 의식-,<<동국여지승람>> 인물조의 분석을 통하여-> (한국사론 3집, 1976)에 의하면 “족보에 관한 사실들은 《설원록》 자체가 왕명을 받들어 당대의 석학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신뢰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여기서 밝혀지듯이 해주 신광사 소장의 《차·류세계》의 존재는 오히려 문화류씨보의 빠른 출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라 하였고 이어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결국 문화류씨보 하나가 아니라 연안차씨보를 합친 족보가 되는 셈이다.”라 하였다.

 

다. 남극관의 《차원부설원기》 위작설

 

위작설(僞作說)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남극관(南克寬,1689~1714)의 《몽예집(夢囈集)》 잡저(雜著)편에 “설원기가 비루하고 교만하며 위작되었다”고 처음 판단하였다. “차천로가 문조(文藻)가 있으나 차식의 그 선대에서 족보를 넓히고자 하는 목적 때문에 성삼문 등의 봉교(奉敎)에 기탁하여 꾸며낸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남극관의 기록을 근거로 이후 홍계희(洪啓禧 1703~1771)는 1768년(영조 14년) 하위지 유고집을 간행하면서 설원기(雪寃記)가 위작인가를 의심하여 서문을 싣지 않았다. 윤광소(尹光紹 1708~1786)는 선조인 윤증의 문집에 실린 설원기의 내용은 위작이라고 자기 문집에 싣지 않았다. “내가 말하길 지난해에 남학명의 아들 남극관이 찬한 《몽예집》을 보니 《설원기》의 내용을 의심하였다”. 그리고 황윤석은 설원기를 읽었던 기억을 바탕으로 차천로 부자가 족보 때문에 위작하였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반면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설원기》의 내용을 의심하면서도 취할만한 것이 있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즉 《설원기》 내용을 의심하면서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간하기 모호하지만 하륜에 의하여 80명에게 멸족 당했다는 사실을 고증하였다.

이에 대한 차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남극관(1689~1714)은 당시 영의정 남구만의 손자이며 부친은 남학명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1708년 식년 사마시에서 생원 2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다음해 괴질에 걸려 6년간 병고에 시달리다가 1714년 만 26세로 요절한 인물이다. 1713년에 병중인 자신의 유고를 자편하여 《몽예집(夢囈集)》을 내었다. 그는 자신이 “20여세에 병을 얻어 오직 서책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고 간간이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어 문자로 표현하였으나 자못 잠꼬대에 가깝다는 의미에서 몽예라 이름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질적인 고증을 통한 주장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극관은 왜 《설원기》에 대해서 위작설을 제기하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차원부설원기》가 구봉령(具鳳齡), 권문해(權文海), 권별(權鼈), 이로(李魯), 문경호(文景虎), 류몽인(柳夢寅) 등 영남 남인(南人)에 의해 읽히기 시작하여 이후 윤순거(尹舜擧), 윤증(尹拯), 이익(李翊) 등을 통해 서인(西人)의 근거지인 기호지방으로 퍼져 나가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위작설을 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서인이었던 남구만의 손자인 남극관은 철저한 서인세력이었다.

 

라. 이수건 교수의 위서 주장

 

영남대 이수건 교수는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들을 비판하면서 차원부의 《설원기》에 대해 언급하였다. “《설원기》는 남극관과 황윤석의 기록을 근거로 남극관, 황윤석 등에 의해 저자들로 추정되는 차식(車軾) ,차천로(車天輅), 차운로(車雲輅) 3부자의 활동시기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기까지라는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16세기 후반 차씨 3부자에 의해 위작되었다고 짐작된다“고 하였다. .

 

차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조선후기부터 《설원기》위작설을 제기한 사람들은 단지 남극관의 몽예집의 내용에 의하여 <설원기>의 위작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구체적 위작자로 지명한 차식 3부자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이를 검증하고자 한다.

박은정의 논문 “<《차원부설원기》이본의 유통과 그 배경>에 의하면 구봉령(1526~1586)의 <백담선생문집> 잡저 편에서 <설원기> 내용이 확인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설원기>는 적어도 1586년 이전에 필사본 형태로 유통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위작자로 지목되는 차식 3부자는 과연 그때 무엇을 하였는가를 조사해 보자. 우선 차식(1517~1579)은 화담 서경덕 선생에게 글을 배워 1537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1543년 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내섬시직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성균관, 호조, 봉상시, 교서관 승문원등 여러 부서의 좌랑, 주부, 교리, 교감의 벼슬에 오르고 외직으로는 통진, 황주. 해주. 평해 .고성 등 여러 고을의 현감. 군수의 벼슬을 하셨다. 그의 저서로는 차식의 <봉래록>이 있다. 특히 고성에 계실 때에는 해산정이란 정자를 짓고 전우치, 양사언 등 당대의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였으나 <설원기>에 대한 글은 전혀 찾을 길 없다.

또한 차천로(1556~1615)는 1577년 알성문과 병과로 합격하여 개성 교수를 지내다 1583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자로서 근무하던 중 1586년경 고향 친구 여계선의 과거를 볼 때 표문을 지어주어 장원 급제 시킨 일로 함경도 명천에 유배를 간 적이 있었는데, 문조가 있어 1588년 귀향에서 풀려난다. 그 후 1589년 황윤길, 김성일(1538~1593)이 일본에 갈 때 문사로서 1590년까지 일본의 사신 행열로 갔다 왔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남으로 선조를 원종하였고, 명나라의 원군을 불러오는데 모든 문서는 오산 차천로가 담당하여 임진란을 겪는데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과연 어느 기간에 설원기와 같은 불멸의 서적을 위작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과거를 급제하기 전에는 과거 시험을 급제하기 위하여 진력을 다하였을 것이고 과거 급제 후에는 자신의 공적을 쌓기 위하여 진력을 다하였을 것이다. 전혀 <설원기>를 구상하여 쓸 수 있는 기간을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오산의 아우인 창주공 운로(1559~1637)는 1579년에야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1583년 알성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586년에 이미 <차원부 설원기> 필사본에 보급되어 있었다면 오산 차천로와 창주공 운로가 과거 급제(1583)후 불과 3년 만에 완성하였다는 결론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모함이다.

오산 차천로는 <오산집>, <오산설림초고>등의 저서가 있는데 <차원부 설원기>의 내용에 대한 기술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 그와 교류가 잦았던 한석봉(1543~1605), 김성일(1538~1593), 이수광(1562~1628), 윤두수(1533~1601) 등 여러 인사들과 시를 주고 받았는데도 그가 <차원부 설원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창주공 운로도 마찬가지다. 그의 창주집 저서에도 <차원부설원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마. 류** 교수의 《설원기》 의 저자 박팽년이 관직을 도용하였다는 주장

 

류** 교수의 <설원기의 위서 논의>에서 지적한 <차원부 설원기>의 저자 박팽년이 관직을 도용하였다는 주장을 하며 <설원기>가 위서라 주장한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글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지금 같으면 한번 발령이 나면 그때부터 유효하였으나 조선조에는 달랐다. 조선 왕조 실록을 보면

1) 《조선왕조실록》세조 1년 을해 1455년 11월 10일 ~박팽년을 형조 참판 으로 삼았다.

2) 《조선왕조실록》1456년 4월 7일 박팽년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3) 《차원부설원기》완성 일자는 1456년 5월 17일이다. 이때의 박팽년의 관직이 무엇이었느냐는 다툼이다.

4) 《조선왕조실록》1456년 5월 3일자로 노숙동을 형조참판으로 박팽년을 중추원 부사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5) 《조선왕조실록》1456년 5월 18일자 박팽년을 중추원부사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즉 5월 3일 중추원 부사로 갔으면 5월 17일은 중추원 부사가 박팽년의 직위가 아닌가하는 주장인데 5월 18일 다시 중추원부사로 임명함은 지금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러한 예는 흔히 찾을 수 있는 경우이다. 따라서 전문 역사학자들은 박팽년이 5월 17일자 형조 참판이란 직위를 쓴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따라서 저자의 직위를 잘못 썼기 때문에 위서라는 주장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3.결론

이상 《설원기》의 위작 여부를 검토하여 보았다. 위서로 오해한 것은 잘못 이해하였거나 진실을 현 시대적 상식으로 파악 하려는 시대적 착오에서 야기된 일이다. 역사적으로 《설원기》의 위서 논란은 1700년대 혹독한 심사를 거쳤고 1804년 차원부에 대한 연시가 있은 후 약 200년간 아무런 의심 없이 지켜져 온 것이 사실이다.

1998년 《국역 차원부설원기》발간에 따른 오역에 대한 차문과 류문의 불화는 《설원기》의 위작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에 대한 정정은 차문이 성의를 다하여 실행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제 이들의 정정도 다한 것으로 생각된다. 과도한 주장은 그 논거를 찾을 수도 없으며 젊은 세대에게 누를 끼칠 수도 있기에 이제 끝내야 한다.

차문과 류문은 약 1000년이 넘게 동조 이성 관계로 서로 혼인도 하지 않고 살아 왔다. 우리 세대에서 약간의 오해로써 헤어지게 됨은 장래 후손들에게 큰 죄를 짓는 일이며 죽어서도 무슨 낯으로 조상을 찾아뵐지 자못 걱정이 된다.

《차원부설원기》및 원파록의 잘못은 전혀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차문의 의견을 전한다. 동조이성 관계인 차.류 양문이 1000여년 전종사(全宗事)를 놓고 숭조목종의 대종시(大宗是)를 흐리게 하고 욕급선조(辱及先祖)의 우를 범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참고 문헌>

1.이태진, <15세기 후반기의 거족과 명족의식-《동국여지승람》인물조의 분 석을 통하여->, 《한국사론》3, 1976.

  1. 이수건,이수환,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 대구사학》 제86집, 2007.

  2. 김난옥, <여말 선초 정치 변동과 배타적 가문 의식>, 《한국사학보》27 , 2007. 5.

  3. 이수건,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의 비판-성관, 가계, 인물 관련 위 조 자료와 위서를 중심으로->, 《고문서 연구》14, 1998.

  4. 박은정, <《차원부설원기》이본의 유통과 그 배경>, 《한국사론》56, 2010.

  5. 류주환, <차원부 설원기 비평>, 2007. 인터넷, http://kenji.c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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